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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일기] 동네 미용실을 다녀오며...

by 순수한소년 2017.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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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머리를 염색 할 때가 된 듯 했다.
다니던 미용실이 문을 닫아서, 동네를 오가며 봤던 미용실을 찾아가게 되었다.

우리 어머니보다는 나이가 어려 보이지만, 거의 비슷한 연배의 원장님이 계셨다.
'어차피 파마하는거 아니니까, 염색만 잘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원장님께서는 머리를 조금 다듬어야 한다고 하셔서,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이젠 미용실도 오래 다녀보니, 미용사의 가위속도와 각도 자르는 부위만 봐도,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감이 온다.
불과 10분도 안되서, 머리가 단정해지고, 염색이 시작되었다.

처음가는 미용실이다보니, 원장님도 말씀이 없다.
이모같고 엄마 같아서 내 나이라도 말씀드렸다.

원장님  : 음... 말씀 안하셔도 그 나이로 보여요... 
본인     : 아... 네...

말씀이라도 그렇게 안 보인다고 해주실 줄 알았는데 ㅎㅎ
원장님은 조금 있으면, 환갑이라고 하시며, 자식들 얘기를 꺼내놓으신다.
우리 애들 둘 있는데, 딸은 미용실과 붙어 있는 가게에서 공방을 하고,
우리 아들은 나이가 아직 20대 후반이라서 대학원 학비를 대주고 있다고 한다.

대학시절 아르바이트하며 열심히 살았던 내 과거와 비교하게 되었다. 왜 그리 부럽던지...
대학까지 뒷바라지도 부족해서, 대학원까지 부모님께 돈 받고 배우는
얼굴도 모르는 넘의 집 귀한 아들이 부러웠다.

그렇게 많이 지원하실 필요가 있으시냐고, 원장님 편을 들어 드렸다.
'자기가 벌어서 쓰게 하셔야지 왜 그러세요...' 라고 말씀드렸다.
원장님은 아들이 자리 잡으실 때까지 열심히 지원하려고 한다고 한다.

나... 참... 나는 대학생활 8학기동안 아르바이트 안했던 학기는 2/8학기,
8학기 중 고작 2학기 뿐이다.
'내가 흘려왔던 힘겨움과 노력을 하지 않고, 오직 공부로만 사회와의 승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면,
더욱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 하는 생각이 내 머리 속을 지나간다.
대화가 없이 몇 분쯤 지났다.

원장님 : 우리 딸 내 가게 옆에서 공방하는데, 친구랑 밥 먹으러 나가서 아직 안 들어오네...
         우리 애들은 내가 지원해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
         요즘 애들은 어쩜 그리 모르는지 걱정이야...

본인   : 원장님께서 그렇게 지원해주시니, 당연히 모를 수 밖에 없지요...

원장님 : 그럼 손님은 아르바이트 해보셨어요?

평상 시, 누군가가 물어보는 경우가 많은 질문이라, 거침없이 대답했다.

본인    : 저는 건달빼고는 다 해봤어요... 안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어요...

원장님 : 나 이집 시집와서, 5만원짜리 월세살면서,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애들 키우면서 월세도 못 내는 상황이 와서 내 나이 30살에 미용 시작했어.

         미용실하면서 애들 키울 때, 곁에서 잘 돌봐주지도 못하고 키워서 애들한테 아직도 미안해...
         그래서, 어렸을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한 마음이라도 갚으려고
         우리애들 하고 싶은 공부 다 시켜주려고해.

         그리고, 지금 사람들은 어머니께도 잘 못하지만,
         우리 때는, 부모한테도 불평불만도 할 수도 없었고,
         살아계실 때, 아껴쓰면서 용돈드리며, 자식도리 하는게 다였어...
         우리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손님도 어머니께 잘해드려요... 어머니들은 자식에게 큰거 안 바래요...

         큰 소리 칠 만큼 못 살아도, 자리잡고 살길 바라고,
         만원짜리라도 작은 선물 하나라도 내 자식한테 선물받으면, 그게 인생의 보람이고 행복이에요...
         나도 그저 애들 키우는 행복한 마음에 열심히 살았어.
         손님 어머님이라고 나랑 다르겠어? 똑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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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어머니세대의 어려움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생각해보니, 50년대생들은 한국전쟁 후, 아무 것도 없는 한국에 산업화를 가져온 장본인들이였다.
시끄러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투쟁하셨던 분들 아니던가...

태어나자마자 통금(야간통행금지);;
사전찾아보니, 1945년 9월 8일 ~ 1982년 1월 5일 ;; 자유도 없었구나...
70년대에 20대였을 것이며,
80년대 30대에 군사쿠데타에,
90년대 40대에 IMF였고...
90년대 50대에 자식 대학까지 다 키워놓으니, 극심한 취업난의 시대였다.
정말 복도 없고, 끔찍하구나...
자유도 없는 나라에서 그저 내 가정을 위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정말 고생을 많이 할 수 밖에 없던 시대구나... 하고 생각들었다.

참 맘이 안 좋았다. 이렇게 나라다운 나라를 일구어 놓은 분들이
정작 본인들은 누리지 못하고, 부모와 자식에게만 충실했던 시대가 50년대생 이겠구나...
전쟁 후, 아무 것도 받지 없는 부모를 위해, 사회와 열심히 싸워 나가며, 용돈을 드렸을 것이며,
이미 변화된 시대에 내 새끼 어디가서 기라도 죽을까봐, 또 이렇게 고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내 평생 이런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아무리 시대를 잘 타고나야 한다지만...
내가 50년대에 태어났다면, 인생이 너무 가혹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암울했다.

이쯤 생각이 깊어지니, 우리 어머니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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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초등학교 때, 말수가 너무 없었던 나 때문에 학교에 들리셨던 우리 어머니,
아들의 내성적인 성격을 고쳐주시기 위해, 평일에는 웅변학원,
주말에는 주말학교라는 이름으로 다른 지역으로 견학가서 처음보는 친구들과 1박2일로
자고 집에 오는 학원아닌 학원을 보내셨던 우리 어머니

중학교 때, 김치공장하실 때, 새벽에 자는 나를 깨워서 무거운 배추를 들게 하며,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이제 너도 좀 알겠냐고... 하시며 깨달음을 주셨고,
우리나라가 잘 되려면, 이렇게 새벽에 일어나서 열심히 일하는 시장사람들이 잘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우리 어머니...

새벽에 배추나르고 학교가서 졸다가 선생님께 혼나고 얼차려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너무 억울해서, 선생님께 대들었는데 한달 쯤 지나, 학교 글짓기대회에 어머니와 시장 갔던 일을 썼더니,
선생님께서 미안하다고 울으시며 나를 안아주셨었다. 그 글은 내 인생 처음으로 글짓기로 상을 받았던 글이다.
안아주셨던 선생님의 성함은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의 포근함과 인자함은 20년이 넘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 선생님의 눈물이 불만에 가득차서 대들었던 내 모습을 후회스럽게 했다.
그 사건을 보내며, 나의 유년시절은 이미 지나가고 있었고, 성격형성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학창시절 때, 주먹질하고 싸우는 나 때문에 선생님과 피해학생에게 허리 굽혔던 우리어머니
지금도 생각하면, 억울하고 화가 치밀어 다시 쫒아가서 패주고 싶지만, 이미 지난 일인걸...
집값을 알려주시며, 요즘 시대에는 고등학생도 이정도 개념은 있어야 한다고 경제적개념을 일깨워주셨던 어머니
IMF때, 골목상권의 피해액을 알려주시며, 사업장 규모대비 리스크를 가르쳐주셨던 어머니

20살 되던 해, 남자는 운전만 해도 평생 어디가서 굶어죽지는 않는다고...
운전은 정석으로 배워야 한다고, 굳이 비싼 자동차학원을 보내주셨던 우리 어머니
대학시절 휴학하겠다는 나를 불러놓고, 엄마 원망 안 할 자신 있냐고 물으시며, 나의 판단을 존중해주셨던 어머니

군에 입대하던 날, 그 사람 많은 곳에서 어머니께 큰절하며,
남들보다 잘난 아들이 될 순 없지만, 속 썩인 만큼 열심히 산다고 말씀드렸던 약속은 어디가고,
대학시절 아르바이트 좀 했다고, 불필요하게 남들보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아야 하냐고 투정부리던 내가 한심하다.
당시에는 왜 그렇게 나만 서럽게 사는 것 같고, 내 인생만 힘든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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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수 없이 많은 나의 아르바이트 경험은

첫 대면 상대의 인상과 말투를 선입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넓은 시점을 갖게 했고,
직장동료들과 꺼리낌없이 소주한잔 할 수 있는
대인관계에 있어 원만한 성격을 선물했다.

선배답지 않은 선배들은 좋은 선배와 나쁜 선배를 구분할 수 있게 만들어,
현재의 나는 우울한 내 기분을 배려 해줄 수 있는 직장상사를 만날 수 있게 했다,

더러웠던 경쟁사회는
부족한 나의 업무능력을 보다 빠르게 업그레이드 시켜주었다.

오늘 하루의 업무시간은
정신없고, 화가나고, 억울하고, 짜증도 많이 났지만,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이 글을 쓰게 하는 동기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글은
잊고 있던 군에 입대하던 날 어머니와의 약속을 떠올릴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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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 에너지가 부족하고, 노력이 부족하고, 내 실력이 부족했던 걸 어머니 탓을 했었는지 내 자신을 반성한다.
어머니께서 얼마나 힘든 시대에 얼마나 열심히 살았던 분인데, 감히 내가 이렇게 투정을 부릴 수 있는 건지...
좋은 시대에 태어나게 해주신 어머니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앞에서는 쑥쓰러워서 말씀 못 드리지만,
어머니,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아들은 어머니와의 약속은 지킵니다.
아들은 남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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